‘핀테크’(fin-tech)를 취재하며 여러 전문가를 만났습니다. IT업계 종사자나 금융 연구기관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물었습니다. “한국에선 간편결제가 안 될까요?”
‘알리페이’나 ‘페이팔’ 같은 해외 간편결제 서비스를 쓰면 온라인에서 정말 간편하게 물건값을 낼 수 있습니다. 클릭 한번이면 끝이죠. 그런데 IT 강국이라는 한국에선 온라인쇼핑이 무척이나 험난한 여정입니다. 액티브X 깔고 공인인증서를 받아오는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죠. 1시간 동안 고르고 골라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았는데 플러그인 설치하자 웹브라우저가 제멋대로 꺼졌다 켜지며 목록이 사라진 경험, 한두 번은 겪으셨을 겁니다. 그럴 때면 분통이 터져 쇼핑은커녕 컴퓨터를 부수고 싶은 마음이죠. 제 질문을 받은 전문가의 대답도 한결같았습니다.
“한국에서 간편결제요? 절대 안 될 걸요.”
한 국내 핀테크 업체 대표는 한국 금융기관은 위기의식이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은행이) 기간산업 성격을 띄고 있어, 망한다는 생각을 안 한다”라는 게 그의 지적입니다. 그는 한국 금융기관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금융 서비스를 혁신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규제를 풀려고 노력할 시간에 외국자본 들여서 스타트업 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합니다. 싸우다 시간 다 가요.”
조광수 연세대 교수의 비판입니다. 조 교수는 지난 11월 오픈넷이 마련한 핀테크 포럼에서 굳이 한국에서 핀테크 스타트업을 하려고 아둥바둥대지 말고 한국 규제기관의 손이 미치지 않는 해외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편이 낫다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기술이 이끄는 금융 혁신
IT와 금융 산업의 만남, 핀테크 열풍이 세계적으로 뜨겁습니다. 핀테크란 금융(financial)과 기술(technology)을 합친 말입니다. 정보기술을 이용해 보수적인 금융 시장을 혁신하는 서비스 또는 기업을 가리키는 데 주로 쓰입니다.
카카오페이나 페이팔 같은 지급 결제 분야가 가장 널리 알려진 핀테크 분야입니다. 돈을 쓰는 게 금융의 전부는 아니죠. 핀테크에도 온라인 은행, 신용평가, 자산 관리, 크라우드펀딩 등 다양한 분야가 있습니다.
2014년까지 450여개 핀테크 회사가 34억달러, 우리돈 3조7천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자받았습니다. 핀테크 분야에 몰리는 투자금은 다른 분야에 비해 4배 가까이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2018년까지 60억달러(6조5천억원) 가량이 핀테크 분야에 투자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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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핀테크 투자 현황 (출처 : 액센츄어 보고서)
봇물 터진 해외 핀테크 기업
해외에선 거의 모든 금융분야에 IT기업이 뛰어들어 판을 뒤흔드는 중입니다.
애플이 내놓은 간편결제 서비스 ‘애플페이’를 볼까요. 스마트폰을 결제기에 대고 지문만 인식하면 로그인도 비밀번호도 필요 없이 간단히 물건값을 치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런 편리함 덕분에 애플페이는 미국 시장에서 빠른 속도로 저변을 넓히고 있습니다. 개인 자산관리 서비스 ‘민트’는 한눈에 내 금융자산을 보여주고, 자산 흐름을 분석해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합니다.
소비자용 서비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은행이 할 법한 일까지 뛰어든 핀테크 스타트업도 많습니다.
‘트랜스퍼와이즈’는 외화 송금 플랫폼을 만들어 사용자끼리 외화를 맞교환하도록 해 평균 10% 정도인 해외 송금 수수료를 최대 0.5%로 크게 줄였습니다. 해외 지점을 운영하고 직원을 고용해야 하는 은행이나 국제 송금회사는 도처히 따라잡기 힘든 비용 구조입니다.
금융 서비스에서 신용평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 소득과 자산 규모, 그동안 거래해 온 내역을 분석한 데이터는 내가 이자율 얼마에, 얼마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금융회사가 결정하는 근거가 됩니다. 국내에서는 이런 일을 신용평가 기관이 도맡는데요. 몇 가지 설문조사만으로 개인 신용도를 평가하는 서비스도 있습니다. ‘비주얼디엔에이’입니다. 이 서비스는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가요”, “비오는 날엔 파전인가요, 부추전인가요?”라는 식으로 사용자의 취향이나 성격, 심리적 상태 등을 물어봐 신용도를 평가합니다.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꽤 효과가 있습니다. 마스터카드는 2014년 비주얼디엔에이 데이터를 대출 승인에 도입해 부도율을 기존보다 23% 낮췄다고 발표했습니다.
결제가 편리해지면 그만큼 위험성이 커지는 게 아니냐고 걱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려를 없애기 위해 나온 서비스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키보드를 누르는 습관이 다릅니다. ‘비헤이비오섹’은 사용자가 자판을 누르는 패턴을 인식해 본인이 맞는지 확인합니다. 덴마크 최대 은행인 댄스케은행은 비헤이비오섹 기술을 고객 2만명에게 시험 적용했는데, 99.7% 적중률로 사용자 본인을 확인해냈습니다. 댄스케은행은 고객 250만명에게 행동 패턴 인증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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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벤처스캐너
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한국은 어떨까요. IT 강국을 자처하지만, 핀테크 시장에서만큼은 한참 뒤처졌습니다. 인터넷뱅킹을 이용하거나 e쇼핑몰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몸으로 느끼게 해 주니,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도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요. 한국 시장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규제 중심 한국, 시장 중심 외국
한국 정부 규제는 ‘포지티브’ 방식입니다. ‘일단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얘기한 것만 하라’는 접근법이죠. 정부가 아주 구체적인 규제안을 만들어두고 이것을 준수해야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보안 인증 항목에는 특정 보안 프로그램을 쓰라는 규정도 있습니다. 구태언 테크앤로 대표 변호사는 한국 정부가 민간 기업을 ‘덜 큰 아이’로 본다고 풀이했습니다.
“정부가 민간 회사를 미성년자 자식으로 보는 것 같아요. 부모로서 미성숙한 민간 회사를 관리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 민간 회사에 해야 할 일을 일일이 지시하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자기를 책임질 능력이 있는 다 큰 자식에게 그러는 부모는 없잖아요.”
반면 미국을 비롯한 해외 정부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제합니다. ‘다 해도 되는데, 이것만은 하지 말라’고 하는 식입니다. 규제 사각지대에서 새 서비스가 나와도 어느 정도 사회에 영향을 미칠만큼 커지지 않으면 굳이 칼자루를 들지 않습니다. 영향력이 커지면 그때부터 여러 의견을 모아 규제를 마련하죠. 한국은 반대입니다. 서비스를 시작하려면 규제에 사업을 철저히 끼워맞춰야 합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황승익 한국NFC 대표의 사연이 그런 예입니다.
한국 정부의 접근 방식이 뿌리부터 규제 중심이다보니 핀테크 스타트업이 싹트기 어려운 토양이 된 겁니다. 규제 틀 안에 간편결제를 욱여넣다보니 ‘카카오페이’ 같은 서비스마저 사용하기 어렵게 손질돼 나오는 것이죠. 다음카카오가 금융결제원과 손잡고 만든 ‘뱅크월렛카카오’를 보면 규제기관이 주도해 만든 핀테크 서비스가 사용자 편의성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규제인 듯 규제 아닌 규제 같은 규제
규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는 규제는 필요하죠. 문제는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규제 때문에 혁신적인 기술이나 서비스가 금융 시장에 뿌리내리지 못 한다는 점입니다.
애플페이나 페이팔처럼 한번에 물건값을 치르는 간편결제 서비스를 선보이려면 서비스 제공업자가 결제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게 안 됩니다.
지난 10월 초 여신금융협회는 온라인에서 신용카드 결제 서비스를 구현하는 결제대행회사(PG)도 신용카드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얼핏 보면 간편결제가 가능해진 것 같습니다만, 실상은 다릅니다.
여신금융협회는 결제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자본금 400억원 이상에 순부채 비율이 200%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또 부정거래탐지 시스템(FDS)도 갖춰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국내 은행 가운데서도 신한은행과 부산은행 단 2곳만 갖춘 시스템을 훨씬 작은 PG에도 요구하는 겁니다. 33개 전문 PG 가운데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한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게 아니라, 이 가운데 몇 가지 기준만 겨우 맞출 뿐입니다.
갓 사업을 시작한 스타트업에게 이런 요구조건은 ‘넘사벽’이죠. 신용카드 회사의 모임인 여신금융협회가 겉으로는 업계에서 자율적으로 규제를 마련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모양새지만, 구조적으로는 간편결제 시장에 스타트업이 들어올 수 없는 장벽을 세워둔 꼴입니다. 금융감독원은 여신금융협회가 내놓은 ‘자율규제안’을 기준으로 금융결제원에 규제안을 마련하라고 위임했습니다.
너무 열성적인 정부, 핀테크 스타트업 발목 잡아
정부가 너무 열성적으로 스타트업을 지원한 탓에 핀테크 스타트업이 국내에서 투자를 유지하지 못하는 일도 생깁니다.
중소기업창업지원법 제3조는 중소기업청이 돈을 보탠 펀드가 금융업과 보험업, 숙박업에 투자할 수 없도록 금지했습니다. 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을 분리하는 ‘금산분리’ 원칙이 스타트업에도 적용된 겁니다.
문제는 중소기업청이 ‘너무 열심히’ 일한 탓에 국내 펀드 가운데 중소기업청 자금을 안 받은 펀드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또 법적으로 창업투자사라는 지위를 갖고 사업을 벌이는 국내 기관 투자자도 같은 법을 적용받기 때문에 금융업에는 돈을 댈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성장 가능성이 충분히 보이는 핀테크 스타트업도 한국에서는 투자를 받지 못합니다. 간편 송금 서비스 ‘토스’를 만든 비바리퍼블리카는 많은 국내 투자회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끝내 돈은 못 받았습니다. 비바리퍼블리카가 금융회사로 구분돼 앞서 말한 법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비바리퍼블리카는 결국 실리콘밸리 투자회사 알토스벤처스로부터 100만 달러를 투자받았습니다.
지금으로선 국내 핀테크 스타트업이 성장하면 그 과실을 해외 투자사가 가져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관련 법을 바꾸거나 대통령령으로 핀테크 스타트업을 규제에서 예외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핀테크 육성한다고? 귀부터 열라!
핀테크 바람이 거세게 불자 정부도 핀테크를 육성하겠다고 발벗고 나섰습니다. 겉보기는 그럴싸하지만 여전히 공급자 중심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핀테크 스타트업과 금융·IT업계 관계자 등 40여명은 이미 11월28일 ‘한국핀테크포럼’을 만들었습니다. 민간이 나서 낙후된 국내 핀테크 시장을 발전시키자고 일어선 겁니다. 그런데 보름 만에 정부가 주요 금융회사를 불러모아 다른 조직을 꾸렸습니다.
금융 산업을 규제하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주요 은행, 신용카드 회사와 모여 ‘스마트금융포럼’을 만들고 핀테크 산업 육성에 힘을 모을 계획이라고 12월14일 발표했습니다. 다음날인 15일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금융발전심의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2015년부터 핀테크 분야를 육성하기 위해 금융 규제를 전면 손질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와 민간 기업이 손잡기는커녕 제 갈 길만 재촉하는 모습입니다. 이대로 평행선만 달린다면 또 시장 상황과 거리가 먼 탁상행정이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핀테크포럼 박소영 의장(페이게이트 대표)은 “대외적으로 발표를 쏟아내 뭔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라며 “규제기관과 핀테크 기업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면서 각자 애로사항이 무엇이고 해결책이 뭔지 도출해야 하는 마당에, 지금처럼 스마트금융포럼 따로 핀테크포럼 따로 하면 안 된다”라고 꼬집었습니다. 답답한 상황이 되풀이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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